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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법/교통사고

경미한 통증만 있는 교통사고, 구호조치 없이 떠나면 뺑소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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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가벼운 접촉 사고’, 그 뒤의 법적 문제

아마 운전해 보신 분들이라면 한두 번쯤은 이런 상황을 겪어보셨을 겁니다. 신호대기 중에 앞차를 살짝 충격했는데, 상대방이 “괜찮다”며 그냥 가라고 하는 경우 말이죠. 그런데 며칠 후, 그 사람이 통증을 이유로 경찰에 신고하고 “뺑소니” 운운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단순한 접촉 사고로 끝난 줄 알았던 상황이 형사처벌로 이어질 수 있는 걸까요?

 

이번 글에서는 대법원 판례를 바탕으로 경미한 상해만 발생한 사고에서 운전자가 구호조치를 하지 않고 떠났을 경우 뺑소니로 처벌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 도주운전죄(뺑소니)의 법적 요건은?

교통사고 후 도주행위, 즉 흔히 말하는 ‘뺑소니’는 도로교통법과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엄중하게 처벌됩니다.

우선 도로교통법 제54조 제1항은 교통사고를 발생시켰을 경우 필요한 조치사항으로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도로교통법 제54조 제1항
차 또는 노면전차의 운전 등 교통으로 인하여 사람을 사상하거나 물건을 손괴한 경우에는 그 차 또는 노면전차의 운전자나 그 밖의 승무원은 즉시 정차하여 다음 각 호의 조치를 하여야 한다.
1. 사상자를 구호하는 등 필요한 조치
2. 피해자에게 인적 사항(성명ㆍ전화번호ㆍ주소 등을 말한다) 제공

 

뺑소니는 교통사고를 내고도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도주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뺑소니에 대한 처벌규정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5조의3 (도주차량 운전자의 가중처벌)
① 자동차등의 교통으로 인하여 「형법」 제268조의 죄를 범한 해당 자동차등의 운전자가 피해자를 구호하는 등 「도로교통법」 제54조제1항에 따른 조치를 하지 아니하고 도주한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가중처벌한다. 
1. 피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하고 도주하거나, 도주 후에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
2. 피해자를 상해에 이르게 한 경우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500만원 이상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결국 뺑소니가 성립하려면 형법 제268조의 죄, 즉 업무상과실 또는 중과실 치사상죄를 범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뺑소니가 성립하기 위한 요건으로서의 "상해"는 어느 정도이어야 할까요? 단순 통증도 여기에 해당할까요?

3. 경미한 상해도 ‘상해’에 해당될까? 대법원의 입장

대법원은 극히 경미한 정도의 상처인 경우에는 뺑소니의 전제인 상해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해석합니다. 

대법원 2003. 4. 25. 선고 2002도6903 판결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 제5조의3 제1항이 정하는 "피해자를 구호하는 등 도로교통법 제54조 제1항에 의한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고 도주한 때"라고 함은 사고운전자가 사고로 인하여 피해자가 사상을 당한 사실을 인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를 구호하는 등 도로교통법 제54조 제1항에 규정된 의무를 이행하기 이전에 사고현장을 이탈하여 사고를 낸 자가 누구인지 확정할 수 없는 상태를 초래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므로, 위 도주운전죄가 성립하려면 피해자에게 사상의 결과가 발생하여야 하고, 생명 신체에 대한 단순한 위협에 그치거나 형법 제257조 제1항에 규정된 "상해"로 평가될 수 없을 정도의 극히 하찮은 상처로서 굳이 치료할 필요가 없는 것이어서 그로 인하여 건강상태를 침해하였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에는 위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례에서 대법원은 상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뺑소니의 성립을 부정하였습니다. 

  • 매우 경미한 추돌사고로 전치 1주 정도의 요추부 통증 피해를 입은 경우 이는 굳이 치료를 받지 않더라도 일상생활을 하는데 아무런 지정이 없고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자연적으로 치유될 수 있는 정도인 경우 형법상 상해로 볼 수 없고, 더 나아가 도주운전죄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 사례 (대법원 2000. 2. 25. 선고 99도3910 판결)
  • 피해자가 사고 직후 경찰관에게 몸이 아프다고 호소한 적이 없고, 피해자들은 각각 전치1주, 전치 2주의 진단을 받았으나, 전치 2주 진단을 받은 피해자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진술하였고, 병원 기록에 의하면 피해자들의 상태는 불편함을 줄 수는 있으나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상태는 아니었고, 피해자들이 의도적으로 장기간의 입원생활을 한 정황이 보였던 사례에서 형법상 상해를 인정하지 않고 도주운전죄도 부인한 사례 (대법원 2008. 10. 9. 선고 2008도3078 판결)

 

4. 정리: 구호조치의무, 어디까지 지켜야 할까?

법적으로 ‘뺑소니’가 성립하려면 다음 세 가지 요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합니다.

  1. 피해자에게 치료를 요하는 수준의 상해 발생
  2. 운전자가 피해자의 상해를 인식
  3. 구호조치 없이 사고 현장을 떠남으로써 사고 유발자를 특정하기 어렵게 된 경우

하지만 극히 경미한 정도의 상해인지 여부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겠지요. 따라서 경미한 접촉 사고라고 하더라도, 피해자가 통증을 호소하거나 불편을 느낀다면, 일단 연락처를 교환하고 병원 진단을 권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무조건 “괜찮다”는 말만 듣고 자리를 떴다가 법적 분쟁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5. 맺음말: 무심코 떠난 자리,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있을까?

이번 글에서는 일상 속의 가벼운 접촉사고라도 법적 의무를 소홀히 할 경우 형사처벌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특히 구호조치의무나 연락처 제공 등의 절차를 무시하면, 의도와 무관하게 뺑소니 혐의로 비화될 수 있다는 사실은 주의해야 합니다. 

 

다만 대법원은 도주운전죄의 성립요건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어, 의학적 치료가 필요하지 않은 정도의 통증은 ‘상해’로 보지 않아 뺑소니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그렇더라도, 이를 '현장을 곧바로 떠나도 된다'는 신호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고 직후 최소한의 조치와 피해자에 대한 배려는 법적 분쟁에 휘말리지 않는 가장 기본적인 안전장치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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