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관이 시켰습니다.” 군대에서 자주 들리는 이 말이 법적으로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특히 상관의 명령이 명백히 위법한 경우, 이를 따르는 군인의 책임은 어디까지일까요?
군 조직은 상명하복의 원칙에 따라 엄격한 위계질서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상관의 명령이 위법함에도 불구하고 하급자가 그 명령을 따라 불법행위 내지 범죄를 범한 경우 "저는 상관의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라는 변명으로 법적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군조직에서 명령을 둘러싼 법률관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명령발령자의 의무
명령은 필연적으로 명령 발령자(명령자)와 수명자 개념을 전제로 합니다. 즉 명령을 발하는 사람이 있고, 이에 대응하여 명령을 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죠. 일반적으로 군인의 가장 대표적인 의무로 강조되고 있는 것이 명령복종의무입니다. 하지만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약칭: 군인복무기본법)은 군인의 명령복종의무(제25조)보다도 명령 발령자의 의무(제24)를 먼저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선 명령 발령자의 의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군인복무기본법 제24조 (명령 발령자의 의무)
① 군인은 직무와 관계가 없거나 법규 및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반하는 사항 또는 자신의 권한 밖의 사항에 관하여 명령을 발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명령은 지휘계통에 따라 하달하여야 한다. 다만, 부득이한 경우에는 지휘계통에 따르지 아니하고 하달할 수 있고, 이 경우 명령자와 수명자는 이를 지체 없이 지휘계통의 중간지휘관에게 알려야 한다.
③ 명령의 하달은 신속ㆍ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④ 군인은 자신이 내린 명령의 이행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우리는 군인복무기본법 제24조 제1항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군인은 법규에 반하는 사항에 관하여 명령을 발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규정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명령을 발하는 사람은 상관이 되기 때문에 군인복무기본법 제36조 제4항은 동일한 내용을 상관의 책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군인복무기본법 제36조 (상관의 책무)
④ 상관은 직무와 관계가 없거나 법규 및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반하는 사항 또는 자신의 권한 밖의 사항 등을 명령하여서는 아니 된다.
2. 명령복종의 의무
상관은 법규에 반하는 사항, 즉 위법한 사항에 대해 명령을 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당연히 위법한 명령을 발한 자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명령 발령자의 의무 다음에 규정되고 있는 것이 바로 군인의 명령복종의무입니다.
군인복무기본법 제25조 (명령 복종의 의무)
군인은 직무를 수행할 때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결국 군인복무기본법 제24조, 제25조, 제36조를 종합해 본다면, 상관은 법규에 반하는 사항, 즉 위법한 사항에 대한 명령을 해서는 아니 되며, 합법적인 명령을 전제로 수명자(부하)는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상관이 위법한 명령을 내리고 부하가 이를 따를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요? 물론 위법한 명령을 내린 상관은 자신의 명령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법한 명령에 따른 부하도 처벌을 받게 될까요? 이에 대하여는 과거 12.12 군사반란에 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례가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3. 사건의 배경: 12.12 군사반란의 한 장면
12.12 군사반란은 1979년 12월 12일 육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신군부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입니다. 최근 "서울의 봄"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요. 여기서 핵심적인 장면 중의 하나는 신군부가 정승화 계엄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체포에 가담한 신군부 측 인사들은 나중에 군사반란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는데요. 이들은 자신들의 체포행위가 상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에 위법하지 않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대법원은 어떻게 판단하였을까요?
4. 대법원의 판단
【대법원 1997. 4. 17. 선고 96도3376 전원합의체 판결】
상관의 적법한 직무상 명령에 따른 행위는 정당행위로서 형법 제20조에 의하여 그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할 것이나, 상관의 위법한 명령에 따라 범죄행위를 한 경우에는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고 하여 부하가 한 범죄행위의 위법성이 조각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피고인 H가 피고인 A의 지시를 받고 병력을 이끌고 가서 S 총장을 체포한 행위나 피고인 J가 제3공수여단장인 피고인 E의 지시를 받고 병력을 이끌고 가서 AF 특전사령관을 체포한 행위 및 피고인 K가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장 AN의 지시를 받고 병력을 이끌고 가서 X 수경사령관을 체포한 행위는 앞서 본 바와 같이 모두 상관의 위법한 명령에 따라서 범죄행위를 한 것이므로, 위 피고인들이 각자의 직근상관의 명령에 따라 위와 같은 행위를 하였다고 하여 위 피고인들의 행위가 정당행위가 된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대법원은 상관의 위법한 명령에 따른 부하의 행위도 범죄가 성립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단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항변을 배척하였습니다. 즉 명령에 따랐다 하더라도 그 명령이 불법적인 것이라면 부하들도 범죄를 범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5. 판결의 시사점: 명령복종의무의 한계
12.12 군사반란에 관한 대법원 판결은 군인의 명령복종의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중요한 함의를 가집니다.
- 군인이라도 상관의 명령을 무조건 따를 의무는 없다. 군인의 명령복종의무는 최소한 그 명령이 합법적인 것임을 전제로 한다.
- 위법한 상관의 명령을 따를 경우 법적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항변은 법정에서 통하지 않는다.
- 진정 부하를 위하는 상관이라면 위법한 명령을 하지 마라. 위법한 명령을 하다가는 부하를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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