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인을 속여 재산상 이익을 취하면 사기죄가 성립하지요. 그런데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를 속여 조세나 공적인 부담금을 내지 않아 그만큼 재산상 이익을 취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 경우에도 사기죄가 성립할까요? 이 문제를 다룬 대법원 판례를 통해 사기죄의 보호법익에 대해 좀 더 깊이 알아보겠습니다.
사실관계
A는 공무원을 속여 농지보전부담금을 면제받았습니다. 농지보전부담금은 농지를 전용하는 자에게 농지의 보전 및 관리를 위해 부과되는 비용입니다. 쉽게 말하면 농지면적을 감소시키는 원인자로부터 돈을 걷어 농지의 보전 및 조성에 쓰겠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소기업 및 소상공인 지원을 위한 특별조치법」은 일정한 경우 영세 자영 소상공인을 보호해 주기 위해 농지보전부담금을 면제해 주는 제도를 마련하고 있었습니다. A는 이 제도의 허점을 노려 구청의 담당 공무원을 속이고 농지보전부담금을 면제받은 것입니다.
검찰은 A를 사기 혐의로 기소하였습니다. A가 담당 공무원을 기망하여 납부할 의무가 있는 농지보전부담금을 면제받아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였다는 논리이지요.
관련 규정과 법적 쟁점
형법 제347조 (사기) 제1항
사람을 기망하여 재물의 교부를 받거나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사기죄의 보호법익은 재산권입니다. 그런데 위 사실관계에서 A의 행위는 재산권을 침해하였다기 보다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권력작용을 침해하였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여기서 과연 A에게 사기죄의 성립을 인정할 수 있는지가 문제 되었습니다.
법원의 판단
1심과 항소심은 모두 A에게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조세와 부담금은 반대급부적 성격이 없이 공법상 강제로 부과·징수되는 점에서 유사하므로, 기망행위에 의하여 조세를 포탈하거나 조세의 환급·공제를 받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부담금을 강제로 징수하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직접적인 권력작용을 사기죄의 보호법익인 재산권과 동일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대법원도 다음과 같이 하급심과 동일한 판단을 하였습니다.
【대법원 2019. 12. 24. 선고 2019도2003 판결】
중앙행정기관의 장, 지방자치단체의 장 등 법률에 따라 금전적 부담의 부과권한을 부여받은 자(이하 ‘부과권자’라 한다)가 재화 또는 용역의 제공과 관계없이 특정 공익사업과 관련하여 권력작용으로 부담금을 부과하는 것은 일반 국민의 재산권을 제한하는 침해행정에 속한다. 이러한 침해행정 영역에서 일반 국민이 담당 공무원을 기망하여 권력작용에 의한 재산권 제한을 면하는 경우에는 부과권자의 직접적인 권력작용을 사기죄의 보호법익인 재산권과 동일하게 평가할 수 없는 것이므로, 행정법규에서 그러한 행위에 대한 처벌규정을 두어 처벌함은 별론으로 하고, 사기죄는 성립할 수 없다.
대법원은 과거에도 조세포탈과 관련된 사례에서 동일한 취지의 판결을 하였습니다.
【대법원 2008. 11. 27. 선고 2008도7303 판결】
기망행위에 의하여 국가적 또는 공공적 법익을 침해한 경우라도 그와 동시에 형법상 사기죄의 보호법익인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과 동일하게 평가할 수 있는 때에는 당해 행정법규에서 사기죄의 특별관계에 해당하는 처벌규정을 별도로 두고 있지 않는 한 사기죄가 성립할 수 있다.
그런데 기망행위에 의하여 조세를 포탈하거나 조세의 환급·공제를 받은 경우에는 조세범처벌법 제9조에서 이러한 행위를 처벌하는 규정을 별도로 두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세를 강제적으로 징수하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직접적인 권력작용을 사기죄의 보호법익인 재산권과 동일하게 평가할 수 없는 것이므로 조세범처벌법 위반죄가 성립함은 별론으로 하고, 형법상 사기죄는 성립하지 않는다.
주유소 운영자가 농·어민 등에게 조세특례제한법에 정한 면세유를 공급한 것처럼 위조한 면세유류공급확인서로 정유회사를 기망하여 면세유를 공급받음으로써 면세유와 정상유의 가격 차이 상당의 이득을 취득한 사안에서, 정유회사에 대하여 사기죄를 구성하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를 기망하여 국세 및 지방세의 환급세액 상당을 편취한 것으로 볼 수 없다.
위 판결에 따르면 기망행위에 의해 국가적 또는 공공적 법익을 침해한 경우에는 우선 사기죄에 우선하는 특별법상 처벌규정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특별법상 처벌규정이 있다면 사기죄가 아니라 우선 그 특별법상 처벌규정을 적용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됩니다.
결론: 국가나 지자체 공무원을 속여 조세나 부담금을 면제받아 재산상 이익을 취해도 사기죄로 처벌받지는 않는다. 다만, 특별법에 의해 처벌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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