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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법/국제형사법

로마규정(Rome Statute) 탄생과 그 의미: 누가 국제범죄를 심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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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이후 상설 국제법정을 향한 꿈

“전쟁범죄, 반인도범죄, 집단살해죄... 이런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도대체 누가 심판할 수 있을까?”


1945년 나치 지도자들을 심판한 뉘른베르크 재판은 국제형사법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하지만 냉전이라는 장벽 속에서 국제형사재판소의 설립은 반세기 넘게 꿈으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르완다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발생한 집단학살과 성폭력 사건들은 국제사회의 분노를 다시 한번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국제사회는 마침내 영구적인 국제형사재판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역사적 결단이 담긴 문서가 바로 로마규정(Rome Statute)입니다.

 

ICC 이전의 실험들: 재판소는 있었지만 영구적이지 않았다

로마규정 제정 이전에도 국제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재판소는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뉘른베르크와 도쿄 국제군사재판소가 만들어졌고, 1990년대에는 유고슬라비아 내전과 르완다 집단학살을 배경으로 각각의 국제형사재판소가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특정 사건과 기간에 한정된 임시 재판소였다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국제사회는 상설적인 재판소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 나갔습니다. 

 

뉘른베르크와 도쿄의 국제군사재판소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국은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지도부를 국제법에 따라 심판하기 위해 각각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와 극동국제군사재판소(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를 각각 설립했습니다. 이 재판소들은 국가 지도자 개인에게 형사책임을 물으며 전쟁범죄, 평화에 대한 죄, 인도에 반한 죄와 같은 국제범죄의 개념을 정립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으나, 동시에 승전국이 주도한 재판이었다는 점에서 승자의 정의(Victor's justice)라는 비판적 평가도 받았습니다. 

 

ICTY와 ICTR: 비극 속에서 만들어진 임시 정의

그러부터 수십 년 후 1990년대에 벌어진 유고슬라비아 내전과 르완다 집단학살은 국제사회를 다시 한번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이에 대응하여 다음 두 개의 특별재판소를 창설합니다. 

  • ICTY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 구 유고 국제형사재판소):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등 구 유고 지역에서 자행된 전쟁범죄 심판
  • ICTR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Rwanda,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후투족 민병대에 의한 집단학살 등 사건 심판

이 두 재판소는 뉘른베르크 재판소와 달리 유엔이 공식적으로 설립했으며, 특정 사건의 진상을 국제법적으로 규명하고 관련자에게 형사책임을 물었다는 점에서 발전된 형태였습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임시적(ad hoc)으로 만들어졌고, 특정 분쟁에 한정된 관할권만을 가졌다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로마규정의 탄생: 1998년 로마 외교회의

1998년 6월부터 7월까지 로마에서 열린 유엔 외교회의에서는 전 세계 160여 개국 대표들이 모여 영구적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을 위한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이 역사적인 자리에서 채택된 문서가 바로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에 관한 로마규정」입니다. 회의 막판까지도 여러 쟁점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국제형사재판소(ICC) 관할 범죄의 범위

로마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논의 대상은 국제형사재판소의 관할 범죄를 무엇으로 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집단살해죄, 반인도범죄, 전쟁범죄를 재판소의 관할 대상으로 하는 것에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나, 침략범죄의 정의와 관할권 행사 조건을 두고는 많은 국가 간 이견이 있었습니다. 

 

2. 침략범죄의 정의 및 관할권 행사 조건

특히 침략범죄와 관련하여서는 ① 침략범죄를 ICC의 관할대상범죄로 로마규정에 포함시킬 것인지 여부, ② 침략범죄의 정의를 어떤 방식으로 규정할 것인지, ③ 침략범죄와 관련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독일 등 다수의 국가는 침략범죄를 ICC의 관할범죄로 포함시키자는 입장이었던 반면, 미국, 이스라엘 등은 이에 반대하였습니다. 논의 끝에 침략범죄를 ICC의 관할범죄로 포함시키되, ICC는 침략범죄의 정의와 관할권 행사 조건을 정하는 조항이 채택된 후에 침략범죄에 대한 관할권을 행사하도록 타협을 하였습니다. 

 

3. 재판소의 관할권 행사 방식

로마회의에서는 ICC가 관할할 범죄에 대해 이해관계국의 동의 없이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모든 이해관계국들의 동의를 받도록 할 것인지에 대한 국가 간 입장차가 있었습니다. 자동적으로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 아니면 ICC의 관할권 행사에 당사국의 별도 동의가 필요한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결국 타협점으로 범죄발생국 또는 범죄혐의자 국적국이 로마규정 당사국일 경우 ICC가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고, 이는 현재의 로마규정 제12조에 반영되었습니다.  

 

로마규정은 이러한 논쟁 끝에 120개국이 찬성하여 마침내 채택되었고, 이후 2002년 7월 1일 정식 발효되면서 ICC는 역사상 최초의 상설 국제형사재판소로서 그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1998년 유엔 외교회의가 로마에서 개최될 당시의 모습 (출처: 유엔 홈페이지)

 

로마규정의 의의와 한계

로마규정의 의미는 단순한 국제협약 그 이상입니다. 이 규정의 가장 큰 의의는 국제범죄 처벌이 더 이상 개별 국가의 국내법과 정치적 판단에만 맡겨지지 않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대신 국제공동체 자체가 주체가 되어 중대한 국제범죄를 형사적으로 처벌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확립했습니다. 이러한 '처벌의 국제화'는 정의 구현이 특정 국가의 몫이 아니라 인류 공동의 책임이자 가치라는 점을 명확히 선언한 역사적 성과입니다.

 

더불어 로마규정은 국제형사재판소를 통해 전쟁범죄와 집단학살 등 반인도적 범죄에 대한 국제적 책임을 묻는 시스템을 가동시킴으로써, 장기적으로는 인권 보호와 국제 평화 유지에 기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국제사회가 더 이상 '불처벌의 문화'에 머무르지 않고,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명확한 경고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로마규정에는 몇 가지 한계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1. 주요 강대국들의 불참

미국, 중국, 러시아와 같은 주요 강대국들이 로마규정에 가입하지 않았거나 가입을 철회했습니다. 이로 인해 국제형사재판소는 진정한 의미의 보편적 관할권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은 자국 군인들이 ICC의 관할권 아래 놓이는 것을 강하게 거부하고 있으며, 로마규정 체제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트럼프 1기 정부에서는 국제형사재판소(ICC)를 불법적인 법원(illegitimate court)이라고 혹평하기까지 하였습니다. 

 

2. 정치적 편향성 논란

일부 국가들은 ICC가 특정 지역과 정권에 편향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며 불신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ICC의 중립성과 공정성, 정치로부터의 독립성에 대한 의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3. 침략범죄 관할권 관련 법적 쟁점

2010년 캄팔라 재검토회의에서는 침략범죄의 정의와 관할권 행사 조건을 규정한 개정문이 채택되었습니다. 그리고 ICC는 2018년 7월 17일부터 침략범죄에 대해 관할권 행사를 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에 ICC가 침략범죄에 대해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는 개정문의 해석과 관련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규범적 불확실성은 로마규정 당사국들이 2010년 채택된 침략범죄 개정문을 비준함에 있어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맺음말

로마규정은 단순한 국제조약이 아니라, 국제범죄에 대한 보편적 처벌을 가능하게 한 국제형사사법의 헌법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문서는 20세기 후반 반복된 대량학살과 전쟁범죄의 교훈 속에서, 인류가 정의·인권·형평성을 중심으로 한 국제공동체의 법적 토대를 수립하려는 집단적 결단의 산물이었습니다. 특히 개인에 대한 형사책임을 국제법에 명시하고, 상설재판소를 설립한 것은 중대한 제도적 진전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물론 로마규정에도 한계는 존재합니다.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주요 강대국이 참여하지 않고 있으며, 정치적 중립성 논란과 관할권의 실효성 문제도 여전히 제기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규정은 국제사회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공동으로 책임을 나누겠다는 역사적 선언이자, 아직 도달하지 못한 정의를 향한 첫걸음이라는 점에서 오늘날까지도 국제형사사법의 기준점으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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