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주한 벨기에 대사 부인이 우리나라의 옷가게 직원을 폭행한 사건이 발생하여 공분을 일으켰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외교관에게 인정되는 면책특권의 내용과 그 인정범위를 정리해 보려 합니다.
일반 외국인과는 달리 외교관에 대하여는 접수국에서 일정한 특권과 면제가 인정됩니다. 이러한 특권과 면제는 당초 "외교관의 신체의 불가침권"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후 점차 공관의 불가침 등으로 확대되었습니다. 16세기 말 유럽에서는 외교관의 신체를 침해하는 것이 그를 파견한 타국의 왕에 대한 범죄로 인식되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외교관의 면책특권은 관습국제법으로 인정되어 오다가 오늘날에는 1961년 채택된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 협약(Vienna Convention on Diplomatic Relations)」에 의해 규율되고 있습니다. 이 협약은 2018년 10월 기준으로 192개국이 당사국으로 가입되어 있으므로 사실상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이 당사국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우리나라도 당연히 이 협약의 당사국입니다.
외교관의 면책특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신체의 불가침에 대해 비엔나 협약 제29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Article 29. The person of a diplomatic agent shall be inviolable. He shall not be liable to any form of arrest or detention. The receiving State shall treat him with due respect and shall take all appropriate steps to prevent any attack on his person, freedom or dignity.
외교관은 이처럼 신체적 보호를 두텁게 받고 있는데요. 우리 형법 제108조가 대한민국에 파견된 외국사절에 대해 폭행, 협박, 모욕, 명예훼손을 행한 경우 가중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또한 비엔나 협약 제29조가 명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접수국은 외교관에 대한 공격을 막기 위해 적절한 모든 조치를 취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즉 이 조항에 근거하여 우리나라는 타국에 파견된 우리 외교관들의 신변을 보호해 달라고 그 접수국에 요구할 수 있습니다. 타국도 마찬가지의 요구를 우리나라에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외교관이 범죄를 범하고 있는 현장에서 그에 대해 어떠한 제지도 할 수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외교관의 추가적인 범행을 방지하거나 정당방위 차원의 조치는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음주운전을 하는 외교관을 현장에서 적발하였다면 우선 그가 음주상태에서 운전을 못하도록 막아야 하겠지요. 국제사법재판소(ICJ)도 다음과 같이 동일한 취지의 판시를 한 바 있습니다.
"Naturally, the observance of this principle does not mean ~ that a diplomatic agent caught in the act of committing an assault or other offence may not, on occasion, be briefly arrested by the police of the receiving State in order to prevent the commission of particular crime." The United States Diplomatic and Consular Staff in Teheran. U.S.A. v. Iran, 1980 ICJ Reports 3, para. 86.
외교관은 접수국의 형사, 민사, 행정 재판관할권 등 모든 재판관할권으로부터 면제됩니다. 외교관에 대하여는 강제집행도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외교관은 증인으로서 증언을 할 의무를 지지 않습니다(비엔나 협약 제31조). 따라서 외교관의 범죄는 실무상 "공소권 없음"으로 처리될 것이고, 외교관을 대상으로 한 민사소송 등은 "각하"될 것입니다.
다만 외교관이라 하더라도 다음의 경우에는 접수국의 민사, 행정 재판관할권에 복종해야 합니다.
- 접수국 영역 내의 개인 부동산에 관한 소송
- 외교관이 개인 자격으로 관여한 유언이나 유산, 상속에 관한 소송
- 외교관이 공무 이외로 수행한 직업적 또는 상업적 활동에 관한 소송
예를 들면, 외교관이 주식투자를 한다던가, 사례를 받는 강연활동, 일과시간 외 저술을 통한 인세 수입 등과 관련하여 민사소송에 휘말리면 현지 재판관할권에 복종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해됩니다.
또한 외교관이 접수국 내에서 스스로 소송을 제기한 경우에는 면책특권의 포기로 간주되며, 이에 대한 반소에 관하여 별도의 면제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됩니다(비엔나 협약 제32조).
한편 민사나 행정 재판관할권으로부터의 면제 포기는 그 판결 결과의 집행에 대한 면제 포기까지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즉 판결의 집행을 위해서는 별도의 면제 포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제32조 제4항). 결국 외교관에 대해 민사소송을 제기하여 어렵게 승소하였다 하더라도 그 승소 판결에 대한 집행은 여전히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부동산을 외국 대사관저로 사용하도록 임대차 계약을 체결했는데 대사관측이 임대료를 연체할 경우 부동산 소유주로서는 민사소송을 통한 궁극적 문제 해결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외교관의 특권과 면제는 개인의 권리가 아니라 그를 파견한 국가의 권리입니다. 따라서 특권과 면제는 외교관 개인이 포기할 수는 없고, 본국만이 이를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외교관이 접수국의 법률을 중대하게 위반한 경우와 같은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본국이 외교관의 면책특권을 쉽게 포기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나라도 2017년 당시 주뉴질랜드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던 한 외교관의 범죄 혐의에 대해 뉴질랜드 정부가 면책특권 포기를 요청한 것에 대해 최근 이를 거부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접수국에서 범죄를 범한 외교관은 아무런 법적 처벌도 받지 않게 되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해당 외교관은 본국으로 돌아가 본국의 법률에 의해 처벌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외교관의 면책특권은 그 가족에 대하여도 인정됩니다. 비엔나 협약 제37조 제1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Article 37. 1. The members of the family of a diplomatic agent forming part of his household shall, if they are not nationals of the receiving State, enjoy the privileges and immunities specified in articles 29 to 36.
문제는 위의 규정상 가족(members of the family)의 범위가 애매하다는 점입니다. 비엔나 협약에는 가족의 정의 규정이 없으며, 각국 국내법상으로도 가족의 범위가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법률상 이성 배우자인 경우에는 당연히 여기에 해당하겠지요. 그럼 외교관이 동성 배우자를 데려온 경우는 어떨까요? 일부다처제 국가의 외교관이 부인을 여러 명 데려온 경우는 어떨까요? 사실혼 배우자인 경우는 어떨까요? 결국 접수국이 외교적 측면, 정책적 측면, 상호주의 측면 등을 고려하여 정해야 할 문제로 보입니다.
한편 「한ㆍ미 SOFA」 제22조는 형사재판권을 규율하면서, 미군 당국과 대한민국 당국의 재판권이 상호 경합하는 경우 그 범죄가 (i) 오로지 미국의 재산이나 안전에 대한 범죄 또는 다른 미군, 군속, 그들의 가족의 신체나 재산에 대한 범죄, (ii) 공무집행 중의 작위 또는 부작위에 의한 범죄일 경우 미군 당국에게 미군, 군속, 그 가족에 대해 재판권을 행사할 제1차적 권리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결국 여기서도 가족(dependents)의 범위가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인데, 「한ㆍ미 SOFA」 제1조는 가족의 범위를 다음과 같이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Article 1. (c) "dependents" means (i) spouse and children under 21; (ii) parents, children over 21, or other relatives dependent for over half their support upon a member of the United States armed forces or civilian component.
여기서도 배우자(spouse)에 동성 배우자가 포함되는지 논란이 될 여지도 있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동성 배우자를 인정하지 않는 반면, 미국은 2015년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의해 동성결혼이 합법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동성 배우자를 데리고 주한미군으로 근무하는 미군 장병들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결국 미군 가족에 대한 우리나라의 재판권 행사 범위와 관련된 문제로서 우리 정부가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여 정책적으로 결정할 문제로 보입니다.
가끔은 언론기사 등에서 면책특권을 향유하는 외교관이나 그 공관 등에 대해 "치외법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나 이는 정확한 용어가 아니므로 지양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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