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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법

범인이 타인에게 은신처와 차명 휴대폰을 부탁하여 도피하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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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흔히 보던 도피 생활이 법적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마약 밀수 혐의를 받던 피고인이 지인의 도움으로 은신처와 차명 휴대폰을 사용하며 도피한 경우 범인도피교사죄가 성립할 수 있을까요? 대법원은 최근 이 사건에서 지인에게 은신처를 마련해 달라거나 차명 휴대폰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통상적 도피행위로 볼 수 있어 방어권의 범주에 속한다는 취지로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과연 이 판결은 어떤 법적 의미를 가지며 방어권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1. 사건 개요

2021년 10월, 검찰은 A 씨가 태국에서 메트암페타민(필로폰) 1.5kg을 밀수입했다는 혐의로 A 씨의 주거지를 압수수색했습니다. 이에 A 씨는 지인 B 씨에게 전화하여 "법적으로 어지러운 일이 생겼다. 수사관들이 머리카락을 잘라가고 소변검사도 했다. 어니 머물 곳이 있느냐, 사용할 수 있는 휴대전화 1대만 마련해 달라"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지인 B 씨는 A 씨를 자신의 주거지에서 생활하게 하고, 다른 사람 명의로 휴대전화를 개통한 다음 A 씨에게 이를 건네주어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수사관들이 자신의 주거지로 찾아오자 B 씨는 "나는 A 씨 번호도 모르고 A 씨와 연락하려면 다른 지인과 연락해야 한다"라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A 씨와 B 씨는 해당 마약 밀수 사건 공범의 소개로 2010년 알게 돼 10년 이상 친분을 유지해 온 사이였습니다. 

 

여기서 A 씨가 B 씨에게 한 은신처 제공과 차명 휴대전화 마련 요청을 법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가 문제 되었습니다. 검찰은 A 씨의 이러한 요청이 범인도피교사에 해당한다고 보고 기소하였습니다.  

 

 

2. 법적 쟁점: 범인도피교사와 방어권의 한계

우선 범인도피죄의 법리부터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범인도피죄는 형법 제151조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형법 제151조 제1항
벌금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자를 은닉 또는 도피하게 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여기서 "도피하게 하는 행위"란 은닉 이외의 방법으로 범인에 대한 수사, 재판 및 형의 집행 등 형사사법의 작용을 곤란하게 하거나 불가능하게 하는 일체의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범인도피죄의 법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에는 두 명의 플레이어가 등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범인""그 범인을 도피하게 한 자"입니다. 범인도피죄의 처벌 대상은 후자, 즉 "범인을 도피하게 한 자"이지요. 그럼 실제 도피를 한 범인은 어떻게 될까요? 범인의 도피행위도 처벌 대상일까요?

 

범인이 스스로 도피하는 행위는 원칙적으로 처벌대상이 아닙니다. 범인이 도피하는 것은 어찌 보면 인간의 본성상 당연한 것이고 누구나 예측가능한 행위이니까요. 범인이 도피를 위하여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 역시 도피행위의 범주에 속하는 한 처벌되지 않습니다. 아이러니한 결과이지요. 도피를 한 범인은 도피행위에 대해 처벌을 받지 않지만, 그 도피행위를 도와준 사람은 범인도피죄로 처벌되니까요. 

 

그런데 범인이 도피를 위해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가 언제나 면책되는 것은 아닙니다. 통상적인 도피행위 내지 방어권의 범주를 벗어나게 되면 도저히 봐줄 수 없겠지요. 이 경우에는 바로 "범인도피교사죄"가 성립합니다. 그럼 어느 경우에 통상적인 방어권의 범주에 속하고, 어느 경우에는 방어권의 범주를 벗어나게 되느냐? 그 구별을 위해 대법원 판례는 일정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대법원 2014. 4. 10. 선고 2013도12079 판결】
한편 범인 스스로 도피하는 행위는 처벌되지 않으므로, 범인이 도피를 위하여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 역시 도피행위의 범주에 속하는 한 처벌되지 않으며, 범인의 요청에 응하여 범인을 도운 타인의 행위가 범인도피죄에 해당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범인이 타인으로 하여금 허위의 자백을 하게 하는 등으로 범인도피죄를 범하게 하는 경우와 같이 방어권의 남용으로 볼 수 있을 때에는 범인도피교사죄에 해당할 수 있다. 이 경우 방어권의 남용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범인을 도피하게 하는 것이라고 지목된 행위의 태양과 내용, 범인과 행위자의 관계, 행위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 형사사법의 작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험성의 정도 등을 종합하여 판단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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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방어권의 남용에 해당될 경우에는 범인도피교사죄로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위 판례에서는 범인이 타인으로 하여금 허위의 자백을 하게 하는 경우를 그 예로 들고 있습니다. 범인이 타인에게 "나 대신 네가 범인 행세를 해 달라"라고 하는 경우에는 통상적인 도피행위로 볼 수 없어 범인도피교사죄로 처벌하겠다는 것이지요. 대표적으로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낸 후 다른 사람에게 "네가 운전했다고 진술해 달라"라고 하는 이른바 운전자 바뀌치기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방어권의 남용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는 다음의 요소들을 검토해 보라고 합니다. 

  • 범인을 도피하게 하는 것이라고 지목된 행위의 태양과 내용
  • 범인과 행위자의 관계
  • 행위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
  • 형사사법 작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험성의 정도

 

3. 대법원의 판단: 통상적 도피 vs. 방어권 남용

1심과 항소심은 피고인의 행위가 통상적 도피 행위의 범위를 벗어나 적절한 방어권 행사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범인도피교사죄"의 성립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은신처를 제공해 달라고 하거나 차명 휴대폰을 마련해 달라고 하는 행위는 통상적 도피행위의 범주에 속한다고 본 것이죠. A 씨와 B 씨는 10년 이상의 친분 관계 때문에 B 씨가 A 씨의 부탁에 응해 도와준 것으로 보이며 도피를 위한 인적·물적 시설을 미리 구비하거나 조직적 단체를 구성해 역할 분담을 하지 않았다는 점도 판단의 한 근거가 되었지요. 

 

【대법원 2024. 4. 25. 선고 2024도3252 판결】
피고인(A)이 B에게 요청한 도움의 핵심은 은신처와 차명 휴대전화를 제공해 달라는 것이었고, 이에 B는 피고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주거지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다른 사람 이름으로 개통한 휴대전화를 사용하게 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형사사법에 중대한 장애를 초래한다고 보기 어려운 통상적인 도피의 한 유형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

 

4. 판례 해설: 자기부죄금지 원칙과 방어권의 한계

이번 판결은 자기부죄금지 원칙과 적법한 방어권의 범위를 명확히 정리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즉 피고인의 도피가 형사사법 절차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방어권의 범위로 인정할 수 있고, 타인의 도움을 받는 행위라도 조직적, 계획적이지 않고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면 범인도피교사죄로 처벌하기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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