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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법/국제형사법

왜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침략범죄를 다루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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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부: 전쟁을 시작한 죄는 누가 심판하는가?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고통받는 건 민간인입니다.

전장에 내몰려 죽어가는 병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정작 전쟁을 결정한 지도자들은 어떨까요? 그들은 전쟁의 책임을 질까요?

우리는 전쟁 중 자행된 학살, 고문, 성폭력 같은 전쟁범죄나 반인도적 범죄에는 국제적 처벌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 그 자체를 "불법적으로 시작한 행위", 즉 침략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을까요?

이 질문은 국제사회에서 오랜 시간 논쟁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한 제도적 결실이 바로 국제형사재판소(ICC)입니다.

 

국제형사재판소(ICC)가 침략범죄를 다루게 된 이유

1.  뿌리는 뉘른베르크 재판에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연합국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를 설치하여 나치 지도자들을 처벌하였습니다.

이때 등장한 범죄 중 하나가 바로 "평화에 대한 죄(Crimes against Peace)", 즉 침략전쟁을 시작한 죄였습니다.

재판부는 "침략전쟁은 국제법상 가장 중대한 범죄(supreme international crime)"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법적 요건이나 기준은 없었고, 전후 정치구도 속에서 이 범죄는 오래도록 국제형사법의 공백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2. 로마규정: 침략범죄가 다시 등장하다

1998년 국제형사재판소의 설립 근거인 로마규정(Rome Statute)이 채택되면서, 국제사회는 다시 한번 침략범죄를 법제화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로마규정 제5조는 국제형사재판소의 관할대상으로 네 가지 범죄를 명시하는데, 이 중 하나가 바로 "침략범죄(Crime of Aggression)"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침략범죄의 정의와 관할권 행사 조건은 차후 합의에 따라 정한다고 결정한 것이었지요.

즉 침략범죄를 다루겠다는 의지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합의는 뒤로 미뤄졌던 것입니다. 

지금은 삭제된 로마규정 제5조 제2항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Article 5(2). The Court shall exercise jurisdiction over the crime of aggression once a provision is adopted in accordance with articles 121 and 123 defining the crime and setting out the conditions under which the Court shall exercise jurisdiction with respect to this crime. Such a provision shall be consistent with the relevant provisions of the Charter of the United Nations.

 

3. 왜 미뤄졌을까? 국제정치의 벽

침략범죄는 매우 정치적인 범죄입니다. 

어떤 국가의 무력사용이 정당한 자위권의 행사인지 침략행위인지 판단하는 것은 사법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국, 러시아, 중국 등 강대국들은 침략범죄에 대한 ICC의 관할권 행사에 매우 소극적이었습니다.

자국의 군사행동이 침략으로 판단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4. 2010년 캄팔라에서 돌파구가 열리다

침략범죄는 결국 2010년 우간다 캄팔라에서 열린 로마규정 재검토회의에서 정의됩니다. 

이에 의하면 개인이 범하는 침략범죄와 국가가 행하는 침략행위는 구별되며, 침략범죄는 한 국가의 정치적 또는 군사적 행동을 실효적으로 통제하거나 지시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이 침략행위를 계획, 준비, 개시 또는 실행하는 것을 의미하고, 침략행위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주권, 영토적 완전성 또는 정치적 독립에 반하여 무력을 사용하거나 또는 유엔헌장에 위반되는 방식으로 무력을 사용하는 것으로 정의되었습니다. 

그리고 2018년부터 국제형사재판소(ICC)가 그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이제 국제형사재판소(ICC)는 단지 전쟁 중의 범죄뿐 아니라, 전쟁을 시작한 지도자까지도 법적으로 다룰 수 있는 권한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5.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침략범죄에 대한 관할권 행사 개시의 의미

침략범죄가 ICC의 관할대상범죄에 포함되고, ICC가 침략범죄에 대해 관할권을 행사하게 된 것은 단순한 조항 추가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국제사회가 더 이상 전쟁을 외교 수단이나 정치적 계산의 결과로만 보지 않고, 법적 책임이 수반되는 범죄행위로 본다는 강력한 선언이기도 합니다. 

특히 ICC가 침략범죄를 다루게 됨으로써 국제법은 지도자 개인의 행위를 직접 겨냥하는 도구로 진화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뉘른베르크 이후 계속되어 온 국제형사법의 철학, 즉 "권력자도 법 위에 있지 않다"는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맺음말: 침략범죄의 처벌은 국제법의 진보일까?

ICC가 침략범죄를 다루게 된 배경에는 "전쟁은 정치가 아닌 법의 영역에서 판단되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가치관 변화가 있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많은 도전과 한계가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일으킨 자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의지 자체는 국제법 질서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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