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은행 중앙지점에는 당좌예금을 이용하는 여러 회사들이 있었습니다. 이 회사들은 수표와 어음을 발행했는데, 문제는 계좌 잔고가 부족한 상태에서도 은행 직원 B가 몰래 돈을 빌려줘서 수표를 결제하도록 도와줬다는 것입니다. 은행에서는 정상적인 절차를 따라야 하지만, 은행 직원 B는 서류를 조작하여 마치 정상적으로 입금된 것처럼 기록하고 부족한 금액을 은행 자금으로 결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A은행으로서는 받아야 할 이자를 받지 못하는 손해가 발생했습니다. 결국 은행 직원 B는 업무상 배임죄로 처벌받았습니다.
형법 제356조(업무상의 횡령과 배임)
업무상의 임무에 위배하여 제355조의 죄를 범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형법 제355조(횡령, 배임)
① 타인의 재물을 보관하는 자가 그 재물을 횡령하거나 그 반환을 거부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삼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때에도 전항의 형과 같다.
문제는 A은행의 지점장 C였습니다. 지점장 C는 직원 B의 범죄행위를 알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이를 방치하였습니다. C에게는 어떤 책임이 있을까요? 특히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은 점이 범죄로 평가될 수 있을까요?
이번 글에서는 위 사건을 배경으로 어떠한 행위를 해야 할 의무가 있는 자가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는 경우 성립하는 부작위범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부작위범이란?
일반적으로 범죄는 직접적인 행동, 즉 작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해야 할 행동을 하지 않는 부작위에 의해서도 범죄가 성립할 수 있습니다.
법령, 계약, 조리 또는 선행행위에 의하여 일정한 행위를 할 것이 기대되는 자가 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 이러한 부작위에 의하여도 범죄가 성립할 수 있는데 이를 부작위범이라고 합니다. 즉 부작위가 작위에 의한 법익침해와 동등한 형법적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형법 제18조(부작위범)
위험의 발생을 방지할 의무가 있거나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위험발생의 원인을 야기한 자가 그 위험발생을 방지하지 아니한 때에는 그 발생된 결과에 의하여 처벌한다.
대법원 2006. 4. 28. 선고 2003도4128 판결
형법이 금지하고 있는 법익침해의 결과발생을 방지할 법적인 작위의무를 지고 있는 자가 그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결과발생을 쉽게 방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의 발생을 용인하고 이를 방관한 채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아니한 경우에, 그 부작위가 작위에 의한 법익침해와 동등한 형법적 가치가 있는 것이어서 그 범죄의 실행행위로 평가될 만한 것이라면, 작위에 의한 실행행위와 동일하게 부작위범으로 처벌할 수 있고, 여기서 작위의무는 법령, 법률행위, 선행행위로 인한 경우는 물론, 기타 신의성실의 원칙이나 사회상규 혹은 조리상 작위의무가 기대되는 경우에도 인정된다.
부작위에 의한 방조범
위 사례에서 지점장 C는 자신이 직접 부정한 결제를 한 것이 아닙니다. 직접적인 범행은 부하직원인 B가 한 것이죠. 문제는 지점장 C가 B의 범행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방치하였다는 점입니다. 법원은 지점장 C의 부작위를 직원 B의 범행을 방조한 것으로 평가하면서 지점장 C에게 업무상배임죄의 방조범 성립을 인정하였습니다.
대법원 1984. 11. 27. 선고 84도1906 판결
형법상 방조는 작위에 의하여 정범의 실행행위를 용이하게 하는 경우는 물론, 직무상의 의무가 있는 자가 정범의 범죄행위를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방지하여야 할 제반조치를 취하지 아니하는 부작위로 인하여 정범의 실행행위를 용이하게 하는 경우에도 성립된다 할 것이므로 은행지점장이 정범인 부하직원들의 범행을 인식하면서도 그들의 은행에 대한 배임행위를 방치하였다면 배임죄의 방조범이 성립된다.
형법상 부작위범이 인정된 사례
법원은 여러 사례에서 부작위범의 성립을 인정해 오고 있습니다. 아래와 같은 사례처럼 적극적으로 불법행위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방지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는 사람이 이를 방치한 경우 부작위범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 음란물 게시를 방치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 운영자: 인터넷 포털 사이트 내 오락채널 총괄팀장과 위 오락채널 내 만화사업의 운영 직원에게 콘텐츠제공업체들이 게재하는 음란만화의 삭제를 요구할 조리상의 의무가 있다고 하여 구 전기통신기본법 제48조의2 위반 방조죄의 성립을 긍정한 사례(대법원 2006. 4. 28. 선고 2003도4128 판결)
- 위조상품 판매를 방치한 백화점 직원: 백화점 입점 점포의 위조상표 부착 상품 판매사실을 알고도 방치한 백화점 직원에 대하여 부작위에 의한 상표법위반 방조 및 부정경쟁방지법위반 방조죄의 성립을 인정한 사례(1997. 3. 14. 선고 96도1639 판결)
- 횡령을 알고도 묵인한 공무원: 입찰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이 입찰보증금이 횡령되고 있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방지할 조치를 취하지 아니함으로써 새로운 횡령범행이 계속된 경우 횡령의 방조범으로 처벌한 사례(대법원 1996. 9. 6. 선고 95도2551 판결)
- 물에 빠진 조카를 방치한 삼촌: 살해의 의사로 위험한 저수지로 유인한 조카(10세)가 물에 빠지자 구호하지 아니한 채 방치한 행위를 부작위에 의한 살인행위로 본 사례(대법원 1992. 2. 11. 선고 91도2951 판결)
- 폭발 위험을 방치하고 도주한 화약호송임무자: 폭약을 호송하는 자가 화차 내에서 촛불을 켜 놓은 채 잠자다가 폭약상자에 불이 붙는 순간 발견하도고 도주한 경우 부작위에 의한 폭발물파열죄 성립을 인정한 사례(1978. 9. 26. 선고 78도1996 판결)
맺음말
- 업무상 배임죄는 기업이나 조직에서 자금 및 재산 관리자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로서, 은행 직원이 당좌예금 잔고가 부족하다는 점을 알면서 은행 돈을 이용하여 약속어음이나 수표를 부정하게 결제해 주는 것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 부작위에 의한 방조범은 직접적인 가담이 없어도 범죄를 방치하여 범행을 용이하게 한 경우에 성립할 수 있습니다.
- 은행 지점장은 직원들의 범죄를 방지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이를 알면서도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부작위에 의한 방조범으로 처벌될 수 있습니다.
- 법원은 다양한 사건에서 부작위범의 성립을 인정해 왔으며, 이는 조직 내에서 범죄 예방 책임을 강화하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위 사례에서 은행 지점장 C는 단순한 관리 소홀로 면책될 수 없으며, 법적으로도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처럼 기업이나 기관 내에서 관리자의 역할이 중요하며, 방관 자체가 범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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