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흑금성 사건이 있었습니다. 흑금성은 육군 소령 출신으로 안기부에 특채되어 대북공작 활동을 하던 A의 암호명이었습니다. A는 1997년까지 성공적으로 대북공작활동을 이어가다가 1998년 이른바 “총풍사건”에 연루되어 신분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공작원으로서의 수명이 다하게 되자 같은 해 안기부에서 해고되었습니다.
해고 이후에도 A는 대북활동을 이어가다가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징역 6년을 선고받게 되는데, 이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현역 육군 소장이었던 B가 흑금성 A에게 육군의 야전교범들을 넘겨주고, 군의 작전계획의 일부 내용인 통제선의 위치 등도 넘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B는 재판에 넘겨졌고, 재판과정에서는 「보병사단」 등 야전교범이 군형법 제80조의 “군사상 기밀”에 해당하는지 여부, II급 군사기밀인 작전계획 중 일부인 통제선의 위치 등의 내용이 군사기밀보호법상의 군사기밀에 해당하는지가 쟁점이 되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위 사건에 대한 재판을 배경으로 군형법 제80조에 규정된 “군사상 기밀”의 의미와 군사기밀보호법상의 “군사기밀”의 의미에 대해 각각 알아보겠습니다.
군형법 제80조에서의 군사상 기밀
우선 B가 흑금성 A에게 넘겨준 육군의 야전교범들이 군형법 제80조에서 말하는 “군사상 기밀”에 해당하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법규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군형법 제80조(군사기밀 누설)
① 군사상 기밀을 누설한 사람은 10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
② 업무상 과실 또는 중대한 과실로 인하여 제1항의 죄를 범한 경우에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그렇다면 군형법 제80조에서 말하는 군사상 기밀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대법원 판례가 있습니다.
대법원 2000. 1. 28. 선고 99도4022 판결
군형법 제80조에서 말하는 군사상의 기밀이란 반드시 법령에 의하여 기밀사항으로 규정되거나 기밀로 분류명시된 사항에 한하지 아니하고,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 기밀로 된 사항은 물론, 객관적ㆍ일반적 입장에서 외부에 알려지지 아니하는 것에 상당한 이익이 있는 사항도 포함한다고 할 것이다.
대법원 2007. 12. 13. 선고 2007도3450 판결
외부로 알려지지 아니하는 것에 상당한 이익이 있는지 여부는 자료의 작성 경위 및 과정, 누설된 자료의 구체적인 내용, 자료가 외부에 알려질 경우 군사목적상 위해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 자료가 실무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현황, 자료가 외부에 공개된 정도, 국민의 알 권리와의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해야 한다.
문제는 야전교범이 비밀로 등재되어 관리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야전교범도 군형법에서 말하는 “군사상 기밀”에 해당될까요? 이 점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을 살펴보겠습니다.
대법원 2011. 10. 13. 선고 2011도7866 판결
위 법리를 원심판결 및 원심이 적법하게 채택한 증거들에 비추어 살펴보면, 원심이 군사교범의 경우 비밀로 등재되어 관리되지는 아니하나 일정한 절차에 의하여서만 열람, 대여, 영외반출 및 관리가 가능한 것으로서 그 내용은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공지의 사실이 아니며, 군사교범은 우리 군의 군사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문헌으로서 적에게 유출될 경우 적은 우리 군의 전술을 간파하여 전투를 수행함에 있어 유리하게 되고, 우리 군의 교리보다 상대적으로 우수한 교리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게 되며, 적이 우리의 교범을 바탕으로 교리를 변경할 경우 아군은 적의 변경된 교리를 알지 못하고 작전을 수행해야 되는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 등 그 내용이 북한군에게 알려질 경우 군사목적상 위해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군사교범은 군형법 제80조에서 말하는 “군사상 기밀”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은 수긍할 수 있다.
결국 법원은 B가 흑금성 A에게 육군의 야전교범을 넘긴 행위는 군형법 제80조의 군사기밀누설에 해당된다고 보았습니다. 야전교범이 비밀로 등재되어 관리되고 있지는 않지만,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며, 적에게 유출될 경우 아군이 불리한 입장에 처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군사기밀보호법에서의 군사기밀의 의미
군형법 이외에도 군사기밀 누설을 처벌하는 별도의 규정이 있습니다. 군사기밀 보호법은 제12조에서 군사기밀 누설을, 제13조에서 업무상 군사기밀 누설을 각각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군사기밀 보호법 제12조(누설)
① 군사기밀을 탐지하거나 수집한 사람이 이를 타인에게 누설한 경우에는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② 우연히 군사기밀을 알게 되거나 점유한 사람이 군사기밀임을 알면서도 이를 타인에게 누설한 경우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군사기밀 보호법 제13조(업무상 군사기밀 누설)
① 업무상 군사기밀을 취급하는 사람 또는 취급하였던 사람이 그 업무상 알게 되거나 점유한 군사기밀을 타인에게 누설한 경우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② 제1항에 따른 사람 외의 사람이 업무상 알게 되거나 점유한 군사기밀을 타인에게 누설한 경우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한편 군사기밀 보호법은 군형법과 다르게 “군사기밀”에 대한 정의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군사기밀 보호법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군사기밀”이란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아니한 것으로서 그 내용이 누설되면 국가안전보장에 명백한 위험을 초래할 우려가 있는 군(軍) 관련 문서, 도화(圖畵), 전자기록 등 특수매체기록 또는 물건으로서 군사기밀이라는 뜻이 표시 또는 고지되거나 보호에 필요한 조치가 이루어진 것과 그 내용을 말한다.
군사기밀 보호법 제3조(군사기밀의 구분)
① 군사기밀은 그 내용이 누설되는 경우 국가안전보장에 미치는 영향의 정도에 따라 Ⅰ급비밀, Ⅱ급비밀, Ⅲ급비밀로 등급을 구분한다.
② 제1항에 따른 군사기밀의 등급 구분에 관한 세부 기준은 대통령령으로 정한다.
군사 II급비밀인 작전계획이 군사기밀 보호법에서 말하는 군사기밀에 해당함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군사기밀의 일부인 통제선의 위치 등도 군사기밀에 해당할까요? 이에 대한 대법원 판단을 보겠습니다.
대법원 2011. 10. 13. 선고 2011도7866 판결
군사기밀 보호법의 입법취지상 위 소정의 군사기밀 중 일부를 누설한 자를 위 처벌규정에 의하여 처벌하기 위하여는 그 누설된 부분이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아니한 것으로서 누설된 부분만으로도 국가안전보장에 명백한 위험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야 한다.
위 법리를 원심판결 및 원심이 적법하게 채택한 증거들에 비추어 살펴보면, 원심이 그 판시와 같은 사정을 들어 피고인이 A에게 설명한 II급 군사기밀인 작전계획 중 일부 통제선의 위치 등은 공지의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러한 내용이 북한군에게 알려질 경우 군사목적상 위해한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위 누설내용만으로 군사기밀보호법상의 군사기밀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은 수긍할 수 있다.
결국 II급 군사기밀의 일부 내용인 “통제선의 위치” 등을 누설한 것도 군사기밀을 누설한 것이 되어 군사기밀보호법위반이라는 판단입니다.
대법원 판결의 시사점
이번 판례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 공식 비밀문서로 등재되지 않아도 군형법상 ‘군사상 기밀’이 될 수 있다: 야전교범처럼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고 군사적으로 중요한 정보는 군형법상 기밀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 군사기밀보호법은 ‘군사기밀’의 정의를 구체적으로 규정한다: 군사기밀로 명확히 등재된 정보 전체뿐만 아니라, 그 일부 내용만 유출되더라도 국가안보에 위협이 될 경우 처벌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일부 정보가 공개되었을 때 적에게 유리하거나 아군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한다면, 법적으로 군사기밀로 인정될 가능성이 큽니다.
맺음말
흑금성 사건은 단순한 간첩 사건이 아니라, 군사기밀의 범위와 보호 필요성을 다시금 환기시킨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법원은 공식적인 비밀문서로 지정되지 않았더라도 군사적으로 중요한 정보라면 ‘군사상 기밀’로 인정할 수 있고, 군사기밀보호법상 ‘군사기밀’ 역시 부분적인 정보 유출도 처벌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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